정동청 정신과 전문의가 오징어 게임을 색다른
시선으로 해석해 드립니다!
정신과 의사의 영화, 드라마 분석! '정CINE 진료실' 앞으로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정동청 원장의 '오징어 게임' 리뷰]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동청입니다. 얼마 전 진료
중에 아주 슬픈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가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007 시리즈인데요. 환자분께서 진료 중에
갑자기 007 영화의 결말을 얘기하셨습니다. 최근
개봉한 다니엘 크레이그가 등장하는 마지막 007 영화의 결말을 말이죠.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보겠다고 기대하던 그 영화의 결말을 말입니다.
007 얘기를 듣는 순간,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아와 007을 사랑하는 개인의로서의 자아가 충돌했습니다만, 장소가
진료실인만큼 의사로서의 본분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펐지만 정신과 의사의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환자분께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007 정도야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요. 오늘부터는 ‘정씨네 진료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여러분과 영화와 드라마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그때그때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 당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저희 ‘정씨네 진료실’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여러분과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누려고 하다보니, 스포일러에 과다하게 노출될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지만, 제가
최근 경험한 아픔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부작용을 원치 않으시는 분께서는
미리 정주행을 완료하신 다음 저희 영상을 다시 시청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 오늘은 전세계적으로 핫한 작품 ‘오징어 게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오늘이야 말로 영상 자체가 스포일러 덩어리입니다. 따라서 저희 영상을 시청하시기 전에 반드시 정주행을 완료해 주십시오. 에피소드가 9편이지만 너무 흥미진진한 작품이라 끝까지 보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많은 분들이 스토리를 알고 계시겠지만 간단히 정리를 하자면, 거액의
빚을 지고 인생의 벼랑 끝까지 몰린 456명의 참가자가 외딴 섬에 모이면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시작됩니다. 참가만 하면 상을
준다고 사람들을 꼬시더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시키고는 게임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에피소드 1, 45:44) 완전히 겁에
질린 참가자들은 게임을 그만두길 원하지만, 456억이라는 거액의 상금이 걸려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또다른 혼란에 빠집니다.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 게임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지만, 이미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던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돌아와서 다시 게임에 참가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오징어 게임’에는 여러 명의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합니다만, 핵심은 기훈과 상우, 새벽, 깐부 할아버지 4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정재가 연기하는 주인공인 쌍문동에 사는 성기훈은, 대출을
받아서 경마에 돈을 탕진하고, 딸 생일도 모르다가 생일 선물 핑계로 시장에서 노점을 하는 어머니에게
용돈을 뜯고, 거기다가 어머니 현금카드를 훔쳐서는 통장에 있던 돈 50만원을 뽑아서 또 경마장으로 달려가는 한심한 인물입니다. (에피소드 1, 5:50) 쌍문동 성기훈이라는 사람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찌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더 좋게 표현하자면 대책없는 낙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죠. 도박에
빠져있다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 확률과 통계 상 도박을 계속할 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수학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다음번엔 꼭 대박을 칠 것이라는 헛된 기대에 현재를 낭비하면서 살아갑니다.
또다른 인물 조상우는 기훈의 동네
후배인데 서울대 경영학과를 수석 입학한 수재입니다. (에피소드 2, 23:41) 증권회사에 다니던 그는 고객의 돈을 빼돌려 주식파생상품과 선물에 투자했다가 60억원을 잃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기훈과 상우
모두 도박에 빠져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도박의 종류와 규모가 다르고 상우는 비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투자 리스크를 최소화하도록 훈련을 받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인생을
건 도박판인 오징어 게임에 최후까지 생존한 두 사람이 도박에 빠져있던 인물이라는 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도박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깐부 할아버지 오일남 노인은 뇌종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참가자입니다. 치매 증상까지 겹쳐 도저히 게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참가자였죠. 이런 깐부 할아버지를 기훈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챙겨줍니다. 2인 1조로 진행되는 네번째 게임에서도 기훈은 아무도 짝을
하지 않으려는 깐부 할아버지를 챙깁니다. 그러나 네번째 게임은 파트너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잔인한 게임이었습니다. 기훈은 자신이 살기 위해 치매로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노인을 속이는데, 깐부 할아버지는 기훈의 속임수를 다 알면서도 자신의 구슬을 기훈에게 모두 줍니다. 그 유명한 “우리는 깐부잖아.”라는 대사를 남기구요. (에피소드 6, 55:00)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친절한 기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던 걸까요?
기훈이 경마장에서 딴 돈을 소매치기했던
강새벽은 탈북을 하다가 가족과 뿔뿔이 흩어진 아픈 과거를 가진 인물입니다. 탈북 과정에서 아빠는
죽고 엄마는 북한에 다시 끌려갔고 동생은 보육원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피소드 6, 26:34) 소매치기를 해서 돈을 모으는 것이 엄마를 북에서 다시 데려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고 악만 남은 채 오직 가족을 지키겠다는 생각만 남은 새벽에게 선과 악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새벽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죠. 게임에서 처음 만난 지영이 자신을 먼저 챙겨준 새벽을 위해 망설임 없이 목숨을 버리자, 그때부터 타인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되찾기 시작합니다. (에피소드 6, 49:19) 자신이 소매치기를 한 기훈이 계속해서 자신을 챙겨주는 것을 보고는 나중에는 기훈을 챙기고 기훈에게 자신의
동생을 부탁하기까지 하죠.
이 네 명을 포함한 456명 중 첫번째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255명이 죽고 201명이 남았습니다. 투표를 하고 집에 돌아갔던 201명 중 187명이 다시 돌아와서 게임에 참여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456억의 상금을 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 꼭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게임에 임합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걸 깨닫지만, 게임이 진행되면서 믿었던 동료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자신을 위해 남을 속이고 심하면 다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까요? 단순히 돈이 걸려있기 때문에, 목숨이 걸려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직함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 배신하는 것일까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이 아닐까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은 그 행동을 칭찬하고 희생 정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타적인 행동에 이처럼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 행동이 그만큼 드물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 확률을 낮추는 행동이기 때문에 적자생존의 진화론으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상호적 이타성 이론’이 등장하면서 사람이나 영장류를 비롯한 일부 동물들에게서 다른 개체를 돕는 행동이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했는데요. 남을
돕는 행동이 단기적으로는 자신에게 손해가 될 수가 있지만, 상대가 내 행동에 보답을 한다면
장기적으로는 보험에 드는 것처럼 서로의 생존에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동네
사람들이 계모임을 했던 것도 이런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로 돕는 행동이
지속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자신이 베푼 선행이 나중에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상대를 도와줘도 상대방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상호 협력은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서로 돕고 협력하다가 게임이
진행될수록 서로 배신하고 죽이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갈수록 생존자가
줄어드는 오징어 게임의 특성 상, 이번 게임에서 내가 죽거나 아니면 상대가 죽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 선행이 보답받는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우선 자신의
생존부터 확보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람이 타고날 때부터
착하거나 악한 게 아니라, 여유가 있을 때는 베풀고 여유가 없을 때는 자신부터 챙기는 게, 그게 대부분 사람의 본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냉정한 캐릭터인 상우도 처음에는 자기도 빈털털이면서 돈이 없어서 안산까지 걸어가려는 알리의 차비를 챙겨주기도 했습니다. (에피소드 2, 17:16)
한편 지옥 같은 6가지 게임이 끝난 후 기훈은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가 됩니다. 기훈의
판단력이 뛰어나서 우승한 것은 아니죠. 기훈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사실 상우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운 덕분이었죠. 살면서 평생 운이 없었던 기훈이지만, 오징어 게임을 할 때는 세상의 모든 기운이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기훈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 단순히 운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요? 드라마에서 볼 수 있듯 기훈은
생각없이 살아가지만 아주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돈을 소매치기한 새벽이도 구해주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 상우의 목숨까지 구해주려고 합니다. 누군가는
기훈의 그런 착한 마음이 보답을 받은 거라고 얘기할 겁니다. 정말일까요? 세상은 착한 사람이 반드시 보답을 받는 그런 곳이기 때문에 기훈이 끝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걸까요? 게임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은 다른 사람들은 착하지 않아서 벌을 받은 걸까요?
미시건 대학의 로버트 액설로드
교수는 인간의 협력 행동이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분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협력과 배신을 선택할 수 있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에서, 어떤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 개인에게 가장 유리한지에 대해서 연구를 했지요. 게임을 한 번만 한다면
배신이 가장 큰 이익을 남기지만, 게임이 여러 번 반복된다면 협력을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유리해집니다. 여기서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전략은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무조건 잘해주고 다음부터는
상대방에 나에게 하는 그대로 대응하고, 가끔 한 번씩은 용서를 해주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면 손해만 보니까, 상대방이
속일 때는 복수도 필요하다는 거죠. (에피소드 7, 44:13)
그렇다면 맨날 다른 사람에게 퍼주기만
하는 기훈은 어떻게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가 될 수 있었던 걸까요? 와튼 스쿨의 심리학자 아담
그랜트는 베푸는 사람과 받기만 하는 사람, 그리고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이
성공하는지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의대생을 대상으로도 연구하고 영업 사원들을 대상으로도
연구했는데 성과가 가장 낮은 사람들은 역시나 남을 챙기기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과가 가장 높은 사람들 역시 남에게 베푸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지요.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
자신이 도움을 받을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에, 기훈이 최종 우승을 하는 것처럼 큰 보답이 돌아올
수도 있는 거죠. 마지막에 밝혀지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챙기는 기훈의 오지랖 덕분에 기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게임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얻었던 겁니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훈이 누릴 수 있었던 또다른 행운은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게임이 점점 치열해지고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지만,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비인간적인 행동들은 모두 상우가 나서서 대신 처리해 줍니다. 기훈이 유일하게 도덕적인 딜레마에 빠졌던 구슬 따먹기 게임에서 기훈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치매에 걸린
노인을 속이지만, 이마저도 깐부 할아버지의 선의 덕분에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본인이 직접 죄책감을 느낄만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공범이 아니라 피해자라는 인식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예전
게임의 우승자였던 프론트맨이 나중에는 게임 진행의 책임자가 된 것과는 확실히 다른 상황인 거죠.
기훈은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게 순수한 건지 순진한 건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새벽에게 두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아 상금을 나눠가지자고 얘기하는 것도, 게임을 주최하는 사람이 두 명의 우승자를 선 남겨두지 않을 거라는 현실을 아예 인지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알고서도 끝까지 외면한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이 기훈이한테 “그 나이에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고 물어봤을 만큼 기훈은 세상을 자기가 보고싶은 대로 아름답게만 보는 사람입니다. 기훈과 달리 새벽은, 둘 중 살아남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가족을 책임지자고 얘기하죠. (에피소드 8, 20:43) 자신이 부상을 당해 끝까지 살아남기 힘든 상황도 작용했겠지만, 탈북을
해서 소매치기 생활을 하며 거친 세상을 경험했던 새벽은 기훈이 꿈꾸는 아름다운 결말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을 겁니다.
기훈과 함께 마지막 게임까지 살아남은
다른 한 사람 상우에 대해서 잠깐 얘기하자면, 사실 상우라는 사람이 그렇게 냉혈한은 아닙니다. 참가번호 218번 상우의 목표는 오직 아들의 성공을
위해 희생하며 뒷바라지한 어머니를 책임지는 것이지요. (에피소드 2, 23:14) 천장에서 쏟아져내리는 상금을 본 순간 상우의 목표는 확고해지고, 그
목표를 위해 상우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하게 됩니다. (에피소드 2, 5:40)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가 되기 위해 상우는 평소의 그라면 하지 못했을 행동을 거침없이 합니다. 자신을 믿어주던
알리를 배신하고, 최종 게임을 앞두고 3명이
남은 순간에는새벽의 목에 칼을 찔러넣어 남은 경쟁자를 제거합니다.
그러나 우승자가 되기 위한 최종
게임에서 상우는 기훈에게 패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기훈은 상우를 살리기 위해 게임을
포기하겠다고 하지만, 상우는 오히려 옆에 있던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버립니다. (에피소드 9, 13:12) 이 역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상우의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죠. 상우 입장에서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은 어머니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결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 기훈이 상금을 타게 하고 대신 기훈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최선의 선택이 불가능해진 순간 차선의 결정을 선택한 거죠.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인 희생을 통해 상대에게 협력하고 대신 상대방이 자신의 가족을 챙겨주기를 바란 겁니다.
오징어 게임의 최종 우승자가 되어
집에 돌아온 기훈을 기다리는 건 말없이 누워있는 어머니의 시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을 모두 잃은 기훈은 트라우마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폐인처럼 살아갑니다. 삶의 끈을 놓아버린
기훈은 부탁받은 것처럼 새벽의 동생과 상우의 어머니를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우승자 기훈의 삶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상금으로 어머니 수술도
시켜드리고 편하게 장사하실 수 있도록 가게도 하나 차려드렸을지 모르죠. 아니면 아예 어머니가
노점 일을 그만 두시도록 하고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호강시켜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훈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혼한 전처가 데려간 딸마저 미국으로 떠나버린
상태였죠. 자신이 경험한 지옥을 합리화시켜줄 삶의 목적이 남아있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 기훈은 다시 명함 한 장을
받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깐부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초대장이었습니다. 지옥 같았던 오징어 게임을 주최한 사람이 깐부 할아버지였다는 걸 깨달은 기훈은 분노합니다. 뇌종양으로 죽음을 앞둔 깐부 할아버지는 눈길에 쓰러진 노숙자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을지를 두고 내기를
제안하고, 약속한 12시가 되기 직전 기훈이
내기에서 이깁니다. 그런 기적이 때맞춰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두 사람이 벌인 마지막 게임이, 폐인처럼 살고 있던 기훈의 삶의 의욕을 다시 찾아주기 위한 깐부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사람을 믿나? 그 일을 겪고도?”라고 기훈에게 질문을 하지만, 사실은 깐부 할아버지 본인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되찾고 싶었었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찾은 희망인 기훈을 되살리기 위한 착한
사기극을 벌인거라고 생각합니다. (에피소드 9, 35:12) 순진한 기훈은
깐부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에 대한 희망을 찾고서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기훈은
빨간 머리로 등장합니다. 예전의 기훈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상징이겠지요. 그런데 기훈의 빨간 머리는 왠지 어색합니다. 진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맞을까요? 딸을 만나러 미국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주인공은 자신을
오징어 게임에 초대했던 공유와 마주치게 됩니다. 공유를 보고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기훈은 비행기를
타는 대신, 오징어 게임 주최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에피소드 9, 49:29) 사실 기훈은
냉정함을 잃고 인생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는 실수를 반복해 왔습니다. 딸이
태어날 때도 가족 옆을 지키지 못했고, 새벽이 목숨을 잃을 때도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게 새벽을
위험하게 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기훈은 딸과의 약속을 지키는 대신 정의를 선택했습니다. 기훈이 예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